작성일 : 19-04-17 17:39
인니 대선 투표 개시…조코위 대통령 강세, 野후보 맹추격
 글쓴이 : 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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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코위, 지지율 앞서지만 부동층 등 변수 많아…밤늦게 윤곽

득표차 크지 않을 경우 선거 후 집회·시위 등 혼란 가능성

2019년 4월 1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각 투표소에 투표함을 나눠줄 준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자카르타=연합뉴스) 황철환 특파원 = 동남아시아 최대 경제국인 인도네시아의 차기 대통령을 뽑는 투표가 17일 오전 국토 최동단 파푸아 주부터 차례로 시작됐다.

국토가 동서로 5천㎞에 걸쳐 길게 뻗어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동부와 서부는 2시간의 시차가 나며, 투표는 지역별로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현지시간)까지 진행된다.

재선에 도전하는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 현 대통령과 야권 대선후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인도네시아운동당(그린드라당) 총재가 5년 만에 다시 맞붙은 이번 대선은 총선,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다.

투표에는 1억9천200만명 이상의 유권자가 참여할 전망이며, 이는 하루 일정으로 진행되는 선거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개표는 투표 종료와 함께 시작된다. 박빙의 접전이 예상되는 만큼 대선 예비개표 결과는 이날 밤늦게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공식 개표 결과는 내달 발표되며,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는 오는 10월 취임하게 된다.

현재로선 조코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비교적 큰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일련의 여론조사에서 조코위 대통령의 지지율은 49∼58%로 프라보워 후보를 두 자릿수 격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부 자바의 빈곤층 출신인 그는 2014년 대선에서도 6.2%포인트 차로 군 장성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인 프라보워를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조코위 대통령의 낙승을 점치기는 이르다.

2019년 4월 13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 겔로라 붕 카르노 경기장에서 선거유세 중인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 대통령(왼쪽)과 같은 달 7일 같은 장소에서 유세했던 야권 대선후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인도네시아운동당(그린드라당) 총재(오른쪽). [AP=연합뉴스자료사진]

투표할 후보를 정하지 않은 부동층의 비율이 높은 데다, 무슬림 강경파의 지지를 받는 프라보워 후보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숨기는 이른바 '샤이 프라보워'(잠재적 야권 지지층)가 상당수일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일부 여론조사기관은 7개월의 공식 선거운동 기간 지지율 격차가 꾸준히 줄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조코위 대통령이 승리하더라도 득표율 격차가 크지 않다면 야권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대규모 시위 등을 벌일 수도 있다.

프라보워 후보 진영은 작년부터 꾸준히 부정선거 가능성을 거론해 왔다. 정치 전문가들은 득표율 차이가 크지 않을 경우 관권선거나 개표 조작 등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보고 있다.

현지 일각에선 야권 지지자들이 중국계 등을 겨냥해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이란 흉흉한 소문도 돈다.

이에 인도네시아 당국은 전국 80만여개 투표소에 공무원 160만명과 군경 34만명을 배치해 치안 유지에 나섰다. 현지 경찰은 자카르타 등 9개 주를 취약지역으로 분류했고, 투표를 전후해 어떠한 대중집회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2019년 4월 1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한 여성이 웬만한 포스터 사이즈인 총선 투표용지 모형을 들어 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자료사진]

하지만 이날 투표소에선 이와는 별개로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

사상 처음으로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등이 하루에 치러지는 탓에 유권자 한 명당 기표해야 할 투표용지만 5장에 이르면서 투표 절차가 상당히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투표용지는 A2 용지에 인쇄돼 포스터를 방불케 하는 크기를 자랑한다.

실제 지난 14일 홍콩에선 해외투표소 앞에서 발생한 병목현상 등 문제 때문에 시간 내에 투표가 마무리되지 못해 유권자 수천 명이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선 특정 후보 진영이 아침 일찍 투표소에 몰려든 뒤 일부러 천천히 기표하는 수법으로 상대방 후보 지지자들의 투표를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은 안전공지를 통해 "선거 당일 및 그 이후 정치적 성격의 집회 및 시위가 증가할 가능성이 상당한 것으로 관측된다"면서 "대규모 집회나 시위가 벌어지는 장소 인근에는 가급적 이동을 자제하는 등 안전에 유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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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신문사 수습으로 일하다 여자라고 무시해 2주 만에 그만둬…외국 항공사 취업해 로마로 연수이탈리아 항공사 알리탈리아에 입사해 근무하던 시절의 강효숙 이사.

경쟁률이 8:1이었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나는 이제 마음껏 놀아볼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라 믿었다. 그 이유는 고3 물리시간에 책에 머리를 묻고 자던 나를 일으킨 선생님이 “대학 가면 실컷 놀 텐데, 그 시간을 위해 공부하는데 그것도 못 참고 자냐”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나는 고3을 무사히 마쳤으니 대학에서는 신나게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970년대 대학생에게는 놀 거리라는 게 별로 없었다. 여고 동창의 주선으로 떼 지어 미팅을 나가면, 하던 소리를 또 하고 또 듣고 하는 게 지루했다.

우리 과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 검정고시를 치른 친구들이 있었다. 시골에서 대학을 올 수 없는 형편을 헤치고 입학한 친구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서울에 살던 나는 전혀 알 수 없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일상이 어떤 이들에게는 치열하게 분투해야 얻어낼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1년 내내 검은 반코트 군복을 입고 사는 친구도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어느 눈 오던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서강대 앞에서 대학로의 옛 서울대까지 걸어가며 모든 포장마차에 들러 인사를 했다. 학생증을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막걸리를 얻어먹고 인사하고 또 걷고 했던, 인심 좋은 시절이었다. 돈은 없어도 호기로 가득한 그때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두려움 없이 일을 저지르는 나의 행보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1학년 1학기 말, 1학년 지도교수가 나를 불렀다. 원칙대로 하면 내 성적은 C여야 하지만, A를 줬다고 했다. 내가 그 과목에서 A를 받지 못하면 학사경고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못 다녀?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엄마였다. 엄마는 열심히 잘 놀며 대학생활하는 딸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엄마의 유일한 바람은 막내딸이 ‘청바지를 벗고 얌전한 원피스를 입고 다녔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런 엄마에게 가장 미안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사진반 동아리방에 앉아있는데, 과에서 가장 비호감이었던 남학생이 놀란 듯 말을 건네왔다. 학과 첫 모임때 여학생들 콧대가 너무 세다고 말했다가 전체 여학생들에게 찍혔던, 멋내기 좋아하는 서울 범생이 친구였다. “무슨 일이 있냐. 평소 너와 달리 무척 기죽어 보인다”며 말을 건 그에게 막막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를 위로하며 영화나 보러 가자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그와의 데이트가 시작됐다. 그 후 나는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건들거리다 때론 치열하게 토론하고 데모하고 연애하며 지냈다.

1973년 4학년이 된 나는 어느 신문사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출근하니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는 재떨이 청소부터 하라고 했다. 그들은 “뭔 계집애가 기자를 하겠다고” 하며 여자인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살벌한 그곳에서 나는 참혹하게 패배했다. 기자의 꿈을 완전히 접고 2주 만에 나왔다. 본격적으로 한국 탈출 작전을 짜는 데 몰입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자들이 여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유학을 가거나 해외연수를 보내주는 외국계 항공사에 취업하거나. 당시 유학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나는 이탈리아 항공사인 알리탈리아(Alitalia) 한국사무소에 발권과 직원으로 입사했다. 입사한 지 6개월 후 드디어 이탈리아 로마로 연수가 결정됐다. 야호! 18가지 서류를 준비해 여권을 받았다. 정보기관으로부터 정신교육과 소양교육도 받았다. 그렇게 어렵게 받아든 여권을 들고 나는 “사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놈의 나라, 난 떠난다” 하며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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